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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집성-101책으로 구성된 고문서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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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표준사례
고문서로 찾아보는 16세기 사회와 생활 1 2 3 4
  • 과거급제

    1489년 손중돈(孫仲暾) 홍패(紅牌)
    1489년(성종 20) 4월 10일에 손중돈이 문과 병과 10인으로 급제하였기 때문에 발급한 홍패이다. 문과나 무과 같은 대과에 합격시에는 그 합격 증서로 홍패를 내려주고, 진사 생원시 같은 소과의 경우에는 백패를 내려준다. 홍패와 백패에는 [과거지보(科擧之寶)]를 안보한다. 손중돈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다. 경주 양동 경주손씨의 중시조로 동강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1513년 안처순(安處順) 백패(白牌)
    1513년(중종8)안처순(安處順: 1492~1534)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왕으로부터 받은 합격증서이다. 붉은 종이를 쓰는 문과 합격증과 달리 흰 종이를 사용하기 때문에 백패(白牌)라고 한다. 1등 제5인의 성적을 거두었다. 합격자 100명 가운데 5등이다. 당시 안처순은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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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직과 급여

    1289년 정인경(鄭仁卿) 공신녹권(功臣錄券)
    1289년(충렬왕 15) 5월에 충렬왕이 정인경을 1등 공신 으로 책록하면서 전답 100결과 노비 4구를 하사하기 위하여 발급한 문서이다. 이는 충렬왕이 1269년(원종 10)에 세자로서 원나라에 함께 따라갔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함이었다. 본 문서는 원문서로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 1819년(순조 19)에 간행된 『서산정씨가승』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정인경의 공신교서 및 정안의 내용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1376년 이자수(李子脩) 조사첩(朝謝牒)
    1376년(우왕 2) 10월에 봉순대부 판서운관사로 임명된 이자수에 대하여 조사(朝謝)를 마쳤음을 인준하기 위하여 발급한 문서이다. 같은 해 7월 12일에 봉순대부 판서운관사로 임명된 이자수에 대하여 10월에 사헌부녹사안천수가 조사 시행을 요구하는 첩(帖)을 밀직사에 보냄에 따라 밀직사에서 조사를 마쳤음을 인준하는 내용의 문서를 이자수에게 발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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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속

    1354년 윤광전(尹光琠) 별급문기(別給文記)
    1354년윤광전(尹光琠)이 아들 윤단학(尹丹鶴)에게 여종 1명을 증여하였다. 딸만 두고 성을 이을 아들은 단학이 유일하니 제사를 모시는 몫으로 여종을 내려준다는 것이 증여의 이유이다. 현전하는 고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증여 혹은 상속문서이다.
    1436~43년 권명리(權明利) 분급문기(分給文記)
    1436년에서 1443년사이 권명리(權明利)는 8자녀에게 종을 상속하면서 본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미 오래 전인 1414년에 1차 상속이 이루어졌는데, 그 이후에 처와 아들 한 명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추가 상속이 있었던 것이다. 자식 없이 사망한 아들 한 명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재분배하고, 처가 소유하였던 종들을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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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밭 사고팔기

    1487년 김효로(金孝盧)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487년우령(禹令)은 논 31부를 목면 12필에 김효로(金孝盧)에게 팔았다. 배꾼인 우령은 직접 배를 타는 군역을 대신하여 내야하는 기선가(騎船價)를 내지 못한 것이 쌓여 논을 팔 수 밖에 없었다. ‘부(負)’는 ‘卜’이라고도 쓰는데 조세를 계산하기 위한 토지 면적의 단위이다.
    1511년 이문산(李文山)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511년(중종6)이문산(李文山)이 배수신(裵守信)으로부터 논을 사는 거래의 계약서이다. 해당 논은 14부(負)의 면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이 논에서 수확할 수 있는 벼의 양이 14부라는 말이다. 해당 전답의 면적을 수확량 기준으로 파악하고 이를 조세수취와 연결시키는 것은 조선시대의 특징이었다. 이 거래에서 해당 논의 가격은 목면(木綿) 10.5필로 계산되었다. 목면은 16~7세기에 현물화폐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본 전답거래와 같은 고액거래에 주로 사용되었다. 가격은 목면으로 산정되었으나, 실제로 지불된 것은 다양한 품질의 면포(綿布)와 세 살 된 암소 한 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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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비 사고팔기

    1507년 손중돈(孫仲暾) 처(妻) 최씨(崔氏) 노비매매명문(奴婢賣買明文)
    1507년(중종2)손중돈(孫仲暾: 1463~1529)의 처 최씨(崔氏)가 남자종 1명을 사들이고 작성한 거래계약서이다. 이 남자종의 원소유주는 최씨의 친정 사촌오빠인 습독관(習讀官)최세징(崔世澄)의 아내인 이씨(李氏)이다. 당시 최세징은 이미 사망한 후이므로 이 거래에 이씨가 직접 참여하여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다. 반면 최씨는 남편이 당시 상주목사로 재직중이었음에도 남편의 명의를 빌리지 않고 직접 거래에 참여하였다. 양반 여성이 직접 거래의 두 당사자로 참석한 드문 자료이다. 최씨는 이 거래를 마친 후 이에 대한 관의 공증을 받아두기 위해 본 문서를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김산군에 공증신청서를 올렸다. 이에 군에서는 전후 문서를 검토한 후 공증문서인 입안(立案)을 발급하면서 관련 자료를 모두 풀로 붙여 함께 내려주었다. 그런 까닭에 이 문서는 입안문서와 함께 점련(粘連)되어 전해오고 있다.
    1521년 손중돈(孫仲暾) 처(妻) 최씨(崔氏) 노비매매명문(奴婢賣買明文)
    1521년(중종16)손중돈(孫仲暾)의 처 최씨는 친정의 사촌오라버니인 최세징(崔世澄)의 처 이씨로부터 여자종 1명을 사들이고 본 거래계약서를 작성하였다. 14년 전인 1507년에도 이씨는 남자종 1명을 최씨에게 판 적이 있다. 이때 이미 스스로를 무자식과부라고 칭하였으므로, 남편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도 두지 못한 외로운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은 아내의 재산은 친정으로 돌려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씨 또한 친정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잘 보전하여 사후에 친정으로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도록 해야 했을 터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가운데 종 2명을 팔아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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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증과 증빙

    1354년 윤단학(尹丹鶴) 사급입안(斜給立案)
    1354년탐진군(眈津郡)의 지방관인 감무관(監務官)이 윤단학(尹丹鶴)에게 내려준 노비 소유권 공증 문서이다. 윤단학은 아버지 윤광전(尹光琠)으로부터 여종 1명을 상속받은 후 이에 대한 관의 공증 문서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발급된 것이 본 문서이다.
    1466년 남손(南蓀) 사급입안(斜給立案)
    1466년영해부에서 남손(南蓀)에게 내려준 공증문서이다. 같은 해 정월 5일에 남손의 아버지 남수(南須)와 그 처 백씨는 자녀들에게 노비를 나누어주었다. 상속을 받은 둘째 아들 남손은 이 상속문서에 대한 관의 공증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한 사실조사를 마친 영해부에서 본 입안(立案)을 발급해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바로 전답과 노비였다. 그 가운데서 노비는 발 달린 재산, 즉 동산(動産)이니 소유권을 명확히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런 까닭에 노비를 상속받자마자 남손는 이에 대한 관의 공증을 요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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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원 올리기

    1354년 윤단학(尹丹鶴) 소지(所志)
    1354년윤단학(尹丹鶴)이 아버지 윤광전(尹光琠)으로부터 물려받은 여종 1명에 대한 소유권을 공증해달라고 관할 지방관아인 탐진(眈津)군에 올린 문서이다. 토지나 노비에 대한 소유권을 관에서 공증하는 제도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1354년 윤동진(尹東眞) 등 소지(所志)
    1354년윤광전(尹光琠)이 아들 윤단학(尹丹鶴)에게 여종 1명을 물려주는 증여 문서를 작성할 때 윤동진(尹東眞)은 증인으로, 김승사(金乘嗣)는 집필자로 참석하였다. 두 달여가 흐른 10월에 증인과 집필자는 자신들이 참여한 이 증여 건의 사실여부를 조사하여 관의 공증문서를 발급해 달라고 관할 지방관아인 탐진(眈津)군에 본 문서를 올렸다. 윤단학이 관의 공증을 요청하는 문서를 올리면서 증인과 집필자에게 함께 사실여부를 확인해주는 본 문서를 올려 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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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적

    1528년 안동부(安東府) 호적(戶籍) 단편
    1528년(중종23)에 만들어진 안동부(安東府)의 호적대장(戶籍臺帳)의 1면이다. 안동(安東) 주촌(周村) 진성이씨(眞城李氏) 종가(宗家)에 소장되어온 것이니, 어느 때인가 이 집안에서 안동부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의 한 면을 뜯어내어 가져온 모양이다. 이 면에서 맨 처음 나오는 호(戶)가 진성이씨 종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훈(李壎: 1467~1538)의 집이니, 선대에 관한 기록을 열람한 후 가지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기록이 없어 그 외 자세한 소장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된 이훈의 나이를 통해 작성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61세로 기록되어 있으니, 그의 생년을 고려하면 1527년(丁亥)에 작성된 내용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가 호적을 정기적으로 작성하는 식년(式年)인 무자년(戊子年)이니, 1527년에 가가호호에서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근거로 하여 이듬해 작성된 호구대장으로 생각된다. 비록 1면에 불과하나 조선전기의 호적대장으로는 유일하다. 그 전후로는 현전 최고의 호적인 1391~2년경 화령부(和寧府) 호적과 1606년(선조39)산음현(山陰縣) 호적이 있을 뿐이다.
    1566년 경주부(慶州府) 첩(帖)
    1566년(명종21)경주부(慶州府)에서 이전인(李全仁: 1516~68)에게 내린 공문이다. 그의 아버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학문적 능력과 품성을 인정받아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45)의 세자시절 사부가 되었다. 병약했던 인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나이 어린 동생에게 양위하고, 명종(明宗: 1534~67, 재위 1545~67)이 즉위하자 이언적은 두 세력 간의 다툼에 휩쓸리어 1547년에 멀리 강계로 유배를 떠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가 유배지에서 남긴 많은 저술은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마찬가지로 유배시절인 1554년에 지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사회의 통치원리를 제시한 글이다. 그가 죽은 지 10 여 년이 지난 이해, 아들 전인은 이 글을 왕에게 올렸다. 아직 이언적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이니 역적의 글이라 하여 왕의 진노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명종은 관직을 떠나 초야에 묻혀 있는 이로서 아버지의 뜻을 잊지 않고 이렇게 그의 글을 올리는 정성이 가상하다며 경상도 감사로 하여금 그에게 자신의 이러한 뜻을 전하도록 하라는 하명을 승정원에 내렸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감사에게, 감사는 이전인이 살고 있는 경주부에 공문을 보내 왕의 뜻이 그에게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본 문서는 이러한 정황과 왕의 뜻을 전하며 속히 나와 이러한 뜻을 받들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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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과 계

    1583~96년 진성이씨(眞城李氏) 계중완의(契中完議)
    1583년(선조16)과 1596년(선조29)에 작성된 안동주촌(周村)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안의 계문서이다. 1583년에 이 계가 처음 결성되었기 때문에 그 설립 취지를 밝힌 서문과 운영 규칙 및 참여인물명단이 수록되었다. 당시 진성이씨가의 종손인 이정회(李庭檜: 1542∼1613)의 고조부인 이철손(李哲孫: 1441~1498)의 친손 및 외손들이 계원이고, 대개 이철손의 증손자 집마다 한 명씩 참여하였다. 증손 대 인물이 이미 사망한 경우는 이정회와 같이 그 아들이 이름을 올렸다. 또한 모두 주촌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 살고 있었다. 즉, 인근에 사는 동고조 내외손들이 함께 친목을 다지고 혼인과 상이 있을 때 서로 돕기 위해 계를 결성한 것이다. 봄가을로 정기모임을 갖고, 혼인이 있는 계원의 집에 각인은 닭이나 꿩 가운데 한 마리씩을 보내고 계금에서는 벼 두 섬을 내어준다는 등의 규약을 1583년에 12개 항으로 만들었고, 1596년에는 여기에 8개 항을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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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인과 제사

    1572년 박대립(朴大立) 혼서(婚書)
    1572년(선조5) 11월 초2일, 박대립(朴大立: 1512~84)이 아들 지술(知述)의 혼사를 위해 사돈댁인 조천상(趙天祥) 집에 보낸 혼서이다. 아들이 이미 장성하였으나 아직 배필이 없는데 일찍이 댁의 따님이 현숙하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이에 혼인을 하고자 삼가 납채(納采)의 예를 행하고자 하니 굽어 살펴봐 달라는 내용이다. 납채는 조선시대 혼인 의식 가운데 하나로, 신랑집에서 혼인을 하고자 예를 갖추어 청하면 신부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절차를 말한다. 본 혼서는 신랑집에서 보내는 예를 갖춘 편지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과정에서는 이미 중매자를 통해 혼인을 허락받은 후에 치르는 의식이므로 청혼과 이에 대한 허락이라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이를 공식화하는 의례인 셈이다.
    1576년 조부(趙溥) 제문(祭文)
    1576년(선조9) 경주부윤조부(趙溥)가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처 정경부인박씨의 상에 지어 보낸 제문이다. 관내 명유(名儒)의 처가 죽었으니 제문을 지어 보내어 예를 표한 것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이언적의 학문과 덕성을 칭송하고 천운이 따르지 못해 유배지에서 별세한 사실과 후에 명예회복된 사실을 열거하고, 아울러 부인 박씨의 자품을 극찬하였다. 평소 이언적의 학문과 덕망을 흠모하였으나 직접 가르침은 입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하게 되어 선생을 사모하고 부인을 공경히 대할 수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부음을 들었으나 질병으로 문상을 가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이 여기며 제문을 짓는 회한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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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한 장, 시 한 수

    1542년 인종(仁宗) 서간(書簡)
    1542년(중종37) 세자시절 인종(仁宗: 1515~1545)이 사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에게 보낸 답장이다. 인종은 1520년 세자에 책봉되어 1544년에 즉위하였으니, 당시는 세자로 있을 때이다. 이언적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오랫동안 세자의 교육에 힘써왔다. 그러나 이때에는 고향에 있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자 수차례 내려진 관직을 사양하고 지방관으로 가기를 청하여 마침내 이해 12월에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임지로 내려가기 전 인종에게 인사와 당부의 글을 올렸고, 인종은 직접 본 편지를 내려 그에 대한 돈독한 마음을 표시하였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공이 지방관에 임명되었으니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었소. 그러나 나는 공의 아름다운 말과 격론(格論)을 오랫동안 듣지 못할까 염려하던 차에 특별히 지극히 절실한 말을 해주니 마음 깊이 감격하였소. 내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할 것이요.”
    1549년 이언적(李彦迪) 서간(書簡)
    1549년(명종4)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아들 만령(萬岭)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잃은 아들을 위로하고 멀리서 염려하고 있으니 공부에 힘쓰고 태만하지 않는다면 큰 다행이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또 대청 서남문(西南門)을 잘 단속하고 집안 일 또한 허술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모름지기 노비(奴婢)는 위에서 가련히 여기고 살펴서 굶거나 얼지 않도록 한다면 또한 다행이라고 하였다. 스스로를 “부(父)”라고 자칭하였으나 본문에서 아들이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어 비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양자 이응인(李應仁: 1535~93)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열다섯 소년이었으니 만령은 관례를 치르기 전에 부르던 아명(兒名)으로 보인다. 어린 양아들에게 집안일을 당부한 것은 그가 당시 멀리 강계(江界)로 유배를 떠나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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